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저는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제가 신년에 말씀드렸던 3가지 다짐 기억나시죠?
운동, 독서, 역사.
이번에는 역사기행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님의 의거, 그리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했던 다른 조상님들이 생각났습니다.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신 우리 선조를 찾아 역사기행을 떠났습니다.
그분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다 보면, 우리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뿌리가 있어야 뻗어 나갈 수 있고, 가야 하는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정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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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폭탄의 주인공, 윤봉길 의사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윤봉길 의사님, 그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의 제국주의에 또 다른 경종을 울렸습니다.
근데 많은 분은 도시락 폭탄만 기억하셨는데요,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님께서 단둥에서 배를 타고 칭다오에 와서 상하이로 거사하기까지 머물렀던 곳이 있었습니다.
상하이까지 갈 돈이 없어서, 채소장사도 하고 세탁소에서 일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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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다행이도 2022년에 주중 한국 총영사관에서 윤봉길 의사님께서 일을 하셨던 세탁소를 찾아내서 중국 정부와 함께 표지석 만드는 작업을 한다고 했습니다.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지만 이런 것부터 완성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차 우리의 아이들이, 역사를 기억할 때, 제가 안중근 의사님의 거사 장소를 가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보고 역사를 봤던 것처럼, 앞으로 생길 표지석이 미래세대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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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의 최고 통치자였던 장제스 군사위원장은 “중국의 1백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 죽거나 다친 일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장제스가 극찬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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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함께 생각나는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이봉창 의사입니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 죽음
이봉창 의사가 김구 선생님을 만날때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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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한민국 마지막 임시정부가 있었던 충칭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 후에, 일본의 공격이 심해져서 우리는 임시정부를 여러 차례 옮겼습니다.
독립의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주독립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드넓을 땅과 산을 거쳐 충칭까지 왔습니다.
충칭 임시정부에 왔을 때 정말 마음과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몇 천킬로가 되는 이곳까지, 피난을 오고 살아서 다시 새로운 조국에 대해서 꿈을 꾼 우리 선조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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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여성독립운동가분들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피와 땀이, 그리고 눈물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이 우리의 헌법 전문에 나와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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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몰랐던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그리고 목숨을 건 장정
김준엽 선생님께서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포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당시 고려대학교 총장이었던 김준엽 선생님은 민정당 소속 이종찬 의원을 만나 이 문구의 삽입을 강력히 요청하셨고, 이종찬 의원은 이를 당에 전달하여 헌법 전문에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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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그는 권력보다는 100년의 미래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정권마다 주요 직을 요청하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김준엽 고대 총장님은 거절하면서 학계 쪽에 남으셨습니다.
사실 김준엽 선생님은 장준하 선생님과 함께 일본에 강제로 징집되었습니다. 그 두 분은 독립운동을 뜻에 품고 일본군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도중 탈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충칭)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5,000킬로가 넘는 장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건 2명의 청년은 드디어 충칭 임시정부로 도착하게 되었고 광복군에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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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문지기 김구 선생님과의 조우
백범김구 선생님께서 끝까지 지켰던 임시정부 청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협조 아래, 그리고 충칭시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잘 보존이 되어 있었습니다.
백범김구 선생님의 동상을 본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렸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 선조가 먼 나라까지 와서 함께 항일 운동을 하면서, 나라를 되찾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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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님의 집무실은 단조롭고 깔끔했습니다.
백범김구 그의 이름처럼, 백성 백에,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자를 따서
백범김구라고 합니다.
가장 낮고 평범한 사람이 대한민국의 문지기로 끝까지 대한민국을 지켰습니다. 다시한번 그의 꿈을 돌이켜 봅니다. 그의 꿈, 통일과 문화 강국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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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이 창설된 곳
충칭에가면 대부분 임시정부를 찾는데요, 사실 충칭에 우리나라 군대의 전신인 대한민국 광복군이 창설된 곳이기도 합니다.
주위에 많은 아파트와 도시개발이 되어있었는데, 한국광복군총사령부는 잘 보호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내 중심에 임시정부와 광복군총사령부가 있어서 이동하기 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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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총사령부에서 기도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한 몸과 한평생을 바친 호국영령. 우리 조상과 선배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여기에 서있습니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광복군이 창설되어서, 항일전쟁을 천명하고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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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협력한 광복군
그리고 임시정부 말기에는 미국 CIA의 전신인 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와 협력해서, 일본을 목표로 한반도 상륙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일명 독수리 작전이었습니다. 1945년 상륙 계획이었지만, 일본이 투항하면서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총알,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젊은 학도병이자 영원한 광복군인 김준엽, 장준하 , 도산 안창호
그리고 마지막까지 대한민국의 문지기로 남은 백범 김구 선생님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의 토대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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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배님들은 군사, 외교, 정치, 공보, 경제 각 부분에서 독립된 대한민국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충칭에 가지 않았으면, 우리 역사의 뿌리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광복군에 대해서 조사하지 않았다면, 충칭에 광복군의 창설기지가 있었던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OSS와 광복군의 독수리 작전을 몰랐다면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음행선지는 바로 한국과 미국이 비밀작전 수행을 준비했던 장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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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그리고 대한민국이 함께 힘을 모았던 곳- 윈난 성의 쿤밍시로
여기까지 글을 읽었으면 독자 여러분은 도대체 제가 어디까지 갈 지에 대해서 궁금해하실 겁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다시 충칭에서 윈난성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광복군과 미국의 OSS가 함께 비밀 훈련을 했던 곳 중의 하나인, 윈난성 쿤밍시로 오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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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을 담아서 펼친 우리의 꿈
충칭에서 저녁 늦게 도착해서 다음날 오후 4시 출국이어서, 우리에게는 실제 움직일 3시간에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OSS와 함께 군사훈련을 했던 오래된 장소입니다. 중국도 일본을 피해 원정군을 만들어서 여기 쿤밍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했던 일은요, 여기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이 함께 힘을 모아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이토록 먼 땅까지 와서, 조국을 찾기 위해 훈련한 장소에 오니 그 느낌이 정말 달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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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아있는 우리 선조의 숨소리
그들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선배님들의 고함이 들렸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보다는, 마음이 오히려 안정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우리 조상은 미래의 땅을 위해 꿈을 꿨습니다.
척박한 이국땅에서, 러시아에서, 만주에서, 그리고 미국과 일본에서 마음을 함께한 청년들과 미래가 이곳에서 언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이상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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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서 우리는 한 없이 작아 졌습니다. 우리 선배님들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아픔과 눈물, 죽음과 도전의 역사 하나 하나가 대한민국의 나이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제가 역사 앞에 당당할 수 있는지 되물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우리 조상 앞에 서는 시간이 올 때, 우리는 당당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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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들께서 만들고 싶은 세상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 동양의 평화, 통일된 조국
저에게는 아직도 너무 광활하고 멀어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선배님들은 더 어두운 환경에서도 독립의 꿈을 꾸고 실행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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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장을 걸으며
계산으로 가능하지 않은 영역입니다.
마음만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사명감과 책임감으로는 부족합니다.
개인을 넘어, 세대와 세대 그리고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우리의 역사인식이 필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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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입니다.
역사는 뿌리입니다. 역사는 방향입니다. 역사는 미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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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님의 집무실
두렵습니다.
역사 앞에서 선다고 했는데, 역사로 들어갈 수록 겁이 났습니다.
왜나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희생과 헌신, 아픔과 도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묻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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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디까지 헌신 할 것인가? 정말 역사 앞에 설 수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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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이 모든 것에 정확하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발걸음이라도, 작은 도전과 헌신이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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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 충칭에서,
거대한 장강을 건너며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꼭 공유드리고 싶습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갈 수 없고 포기하지 않으면, 도달한다."
역사기행을 마치고 돌아온,
역사지수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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